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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전시관(보안과청사): 형무소역사실 지하조사실

by Cecilia_J 20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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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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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 https://sphh.sscmc.or.kr/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근대식 감옥입니다.

1908년 10월부터 1987년까지 약 80년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곳이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곳입니다.

 

 

서대문형무소는 그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1908년 경성감옥

1920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

 

그러다가 서울구치소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되었고 그 후 기존 구치소의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몇몇 시설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철거되었습니다.

그 후 1998년 11월 이 곳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여 그 현장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전시관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시관(보안과청사) : 형무소역사실, 민족저항실 1,2,3, 지하조사실

옥사전시 : 중앙사, 9옥사, 11-12 옥사, 공작사

야외전시 : 한센병사,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창고, 여옥사, 취사장, 망루.담장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번 포스팅에서는 전시관(보안과청사), 그 중에서도 형무소역사실과 지하조사실 관람 후기를 남기고자 합니다.

전시관의 민족저항실과 옥사전시, 야외전시 관람 후기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전시관(보안과청사): 민족저항실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전시관(보안과청사): 민족저항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다녀왔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 https://sphh.sscmc.or.kr/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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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야외전시 관람 후기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야외전시 관람 후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다녀왔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 https://sphh.sscmc.or.kr/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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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옥사전시 관람 후기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옥사전시 관람 후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다녀왔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 https://sphh.sscmc.or.kr/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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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망루가 정문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전시관(보안과청사)

이 곳은 서대문형무소의 업무를 총괄한 건물로 1923년에 세워졌습니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회의실과 소장실, 지하 1층은 조사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권력의 위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정면의 지붕은 높고 웅장하게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어 1908년 처음 경성감옥으로 개소된 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사용되기까지의 모습을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무소역사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

1908~1987

 

 

제국주의의 침략

1876년 강화도조약,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 등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늑약을 거쳐 1910년 강제병합으로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억압과 공포의 상징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 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되었습니다.

개소 당시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일제에 맞서 싸운 한국민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민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이용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이곳에 수감되어 고난을 치렀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부터 1987년까지 80여년간 식민 지배와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한몸을 희생한 수많은 분들이 있었던 역사적 현장입니다.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가 위치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는 조선 후기에는 북쪽 의주로 가는 큰 길인 의주로가 위치했던 곳입니다.

이 곳은 사대문의 안과 밖을 동서남북으로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였습니다.

이에 주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였던 영은문과 모화관(현 독립관)이 있었고 1897년에는 영은문이 없어진 자리에 독립문이 세워졌습니다.

일제는 이곳 현저동에 대규모의 근대 감옥을 섪치하여 이곳을 오가던 한국민에게 식민지 절대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였습니다.

또한 감시와 통제를 위한 식민지 지배 도구로 이용하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독립운동

개소 초기의 경성감옥의 수감인원은 500여명으로 주로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수감되었습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는 의열투쟁과 비밀 결사 요인들이 주로 수감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3,000여명에 육박하는 독립운동가가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1945년 광복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비밀결사, 각종 의열투쟁, 해외 무장투쟁, 사회.문화.노동.농민.학생운동 등의 활동을 펼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순국하여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그 당시 모습입니다.

 

 

전국 형무소 배치도

1936년 당시의 전국 형무소 배치도입니다.

수도권에는 경성, 서대문 형무소가, 지방에는 대전, 전주, 광주, 목포, 대구, 부산에 형무소가 있었습니다.

북한쪽에는 평양, 신의주, 해주, 함흥, 청진에 형무소가 위치해 있었습니다.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

1945년 광복으로 서대문형무소는 11월 21일에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대한민국 정보의 교도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1961년에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서울구치소는 1987년 11월에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였습니다.

이후 1988년 문화재청에서 제 10,11,12 옥사와 사형장을 국가사적 324호로 지정하였습니다.

또한 1998년 서대문구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와 민주화운동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좌우익의 이념 문제와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정치, 사회적 문제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된 진보당 사건(1958), 민족일보 사건(1961), 동베를린간첩단(동백림) 사건(1967), 인혁당재건위 사건(1975)의 피해자들이 수감되거나 사형당하였습니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가 희생당하여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문화재 원형 복원과 보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이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보안과 청사 외벽에 붙여진 흰색 타일을 제거하여 원형을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취사장터를 발굴하여 원형으로 복원하였으며 기타 옥사 및 담장, 망루 등에 대한 원형 보수 정비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지하고문실

이곳 서대문형무소 보안과청사 지하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를 취조하였던 공간입니다.

각 방은 임시구금실, 독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끌려운 독립운동가는 취조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온갖 고문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 지하취조실은 수감자들 사이에서 악명높은 '지하고문실' 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렇게 서대문형무소 지하고문실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 자행하였던 폭력과, 국권을 되찾기 위해 피흘리며 노력한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임시구금실

이 곳은 취조전 수감자를 임시로 잠시 구금하였던 곳입니다.

 

 

임시구금실은 취조 과정에서 자행되는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지들의 비명 소리와 일경의 폭언이 들리도록 배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독립운동가들에게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하였습니다.

 

고문의 흔적과 고통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행한 고문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학한 것들이었습니다.

고문은 독립운동가들의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물리적 폭력으로 인해 정신적 모멸감과 육체적 상처가 그들의 몸과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고문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은 신체가 부러지고 찢기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또한 장기 파열, 허파에 물이 차는 흉막염, 뇌진탕 등의 병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는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병마를 안은 채 수감생활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 안에서 순국하거나 또는 죽음 직전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출소 직후에 순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문의 기록

권영준, '형정반세기'

...(전략) 얼마 뒤 잡혀 들어온 공산당원 송봉우는 이른바 '비행기 태우기' 를 당했다. 비행기를 태운다는 말은 두 손을 뒤로 수갑을 채워 묶고 여기에 밧줄을 이어 천장에 매어다는 것으로 보통 한두시간씩 계속하곤 했다. 이렇게 하고 난 뒤 뒤로 묶여 굳어진 팔을 잘못내리면 곧잘 부러지곤 했기 때문에 이때는 두 팔을 전문으로 내려주는 잡역이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이밖에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벗겨놓고 가죽채찍으로 매질하는 것, 의자에 묶어놓고 고개를 뒤로 젖힌 뒤 코에 고춧물을 붓는다든가, 시멘트 바닥에 무뤂을 꿇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등의 방법이 있었다. (후략)...

 

 

고문경관 고소 사건(1927년)

6.10 만세운동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권오설, 강달영 등은 1927년 10월 16일,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 이에 항의하여 고등계 주임 미와를 고소하였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기관 가운데 하나인 종로경찰서의 주요 간부를 고소한 이 사건은 큰 화제가 되었으나 일제는 부당한 재판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미와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았던 독립운동가 분들의 인터뷰 내용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담담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눈에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하독방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에 감금되었던 지하독방입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비명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 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습니다.

 

벽관 고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입니다.

 

 

벽에 서 있는 관이라 하여 '벽관'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형무소역사실과 지하조사실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한 박물관을 넘어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나라면 과연 그 무지막지한 고문들을 버틸 수 있었을까?

독립운동가 분들께 마음 속으로 다시한번 깊이 감사인사를 드리며 관람을 마쳤습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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