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래된 수도 서울의 역사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1985년 서울특별시립박물관의 건립 추진 계획이 수립되었고,
1993년 박물관 건물을 착공하여 1997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2001년이고, 2002년에 개관하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기본 이용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관람시간 : 09:00~18:00 (입장마감 : 17:30)
관람요금 : 무료
관람방법 : 개인 자유관람
각 층에는 다음 시설이 있습니다.
1층 : 서울역사자료실, 기증유물전시실, 기획전시실
3층 : 상설전시실
(1존 - 조선시대의 서울 / 2존 -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 / 3존 - 일제 강점기의 서울 / 4존 - 대한민국 수도 서울)
1층에 있는 기증유물전시실의 관람 후기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 1층 기증유물전시실
이번 포스팅에서는 3층에 있는 상설전시실에 대한 관람 후기를 남겨볼까 합니다.
3층에 있는 상설전시실 1존과 2존, 3존의 관람 후기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1존 (조선시대의 서울)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2존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3존 (일제 강점기의 서울)
4존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945년부터 2010년대까지의 모습을 다루고 있었는데 먼 옛날이 아닌 바로 얼마 되지 않은 서울의 역사를 보여주다 보니 다른 전시실에 비해 더욱 흥미가 가는 곳이었습니다.
내용이 방대하여 4존에 대한 포스팅은 두개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번째 포스팅은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그리고 두번째 포스팅은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내용을 작성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서울의 모습에 대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4존 (대한민국 수도 서울, 1980-2010년대)
해방과 전쟁기, 서울
한반도는 1945년 8.15 해방을 맞았지만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남한에는 미군정이 시행되었습니다.
일제하 '경기도 경성부' 였던 서울은 1946년 '서울특별시' 로 승격되었습니다.
서울특별시에는 8개의 구가 설치되었고 일본식 동, 정명은 한국식 동명으로 개정되었습니다.
이북에서 남하한 월남민과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 농촌인구의 유입 등이 이루어져 서울의 인구는 급증하였습니다.
또한 1949년에는 고양군과 시흥군의 일부를 편입하여 광복 직후에 비해 도시 면적은 약 2배로 늘어났습니다.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으로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국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정부 수립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으며 서울은 개전 3일만에 북한군에 점령되었습니다.
9.28 서울 수복과 1.4 후퇴로 서울의 침탈과 탈환이 번갈아 이루어지면서 서울시민들은 전쟁 동안 야만적 폭력의 고통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1950-60년대 서울, 다시 일어서는 서울
만 3년간의 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과 더불어 끝났지만 전후 복구는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 후유증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지만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한국경제는 성장의 기지개를 켰고서울도 전쟁의 상흔을 씻어내기 시작했습니다.
1953년에 100만명 정도였던 서울의 인구는 1963년에 300만명, 1970년에 500만명을 돌파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 는 구호 아래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등장하면서 서울의 도시경관은 급격히 변모했습니다.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시민생활은 차츰 나아졌지만 도시 곳곳에는 여전히 빈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폐허를 딛고 재건으로
전쟁으로 페허가 된 서울의 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기와 상수도 시설이 복구되고 도심지에 대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었으며 1958년에는 한강 인도교가 다시 개통되었습니다.
특히 전란중에 5만 5천여 동의 주택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전후 서울은 심각한 주택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흥', '재건', '국민', '희망', 등의 이름으로 많은 주택들이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시내 곳곳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습니다.
여의도, 모래펄에서 '서울의 맨해튼' 으로
여의도의 변화상은 해방 이후 서울 성장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의도에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비행장이 있었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 섬의 대부분은 드넓은 모래펄이었습니다.
1968년 밤섬 폭파와 함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면서 660만m2 의 모래펄은 둘레 7.6km 의 제방으로 둘러싸인 287만m2 의 인공섬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5.16 광장과 국회의사당, 시범아파트 등을 건설함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습니다.
1976년 이후 한국방송공사(KBS)를 비롯한 방송사, 금융기관, 비즈니스 센터, 대기업 본사들이 들어서면서 여의도는 '서울의 맨해튼' 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서울은 공사 중
6.25 전쟁 이후 전재복구 사업은 1960년대 들어 도시개발 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5.16 군사정변을 거쳐 등장한 제3공화국 정부는 적극적인 경제개발 정책을 전개했습니다.
1966년 3월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돌격 건설' 깃발을 내걸고 취임하면서 서울은 끊임없이 공사 중인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도시미관을 개선하고 부족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하여 도심의 슬럼지역을 현대화, 고도화 하였으며 교통 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산을 뚫어 터널을 건설하고 하천을 복개하여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한강과 여의도 개발이 시작되었고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를 건설하여 이제 서울은 강북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강남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판자촌을 아파트 단지로
1966년 서울의 인구는 72만 가구, 380만 명이었으나 주택은 36만동에 불과하여 전체 가구의 절반은 집이 없었던 셈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도심 주변 구릉이나 천변에 판자촌, 즉 무허가 불량주택이 급속히 늘어나 1966년에는 13만동, 1970년에는 20만동을 넘어섰습니다.
주택난 해소와 무허가 불량주택지대의 미관 개선을 위해 서울시는 약 254만m2(77만평) 면적의 판자촌 지대에 시민아파트 2천 동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1969년 한 해 동안 32개 지구에 406동 15,840 가구라는 엄청난 양의 시민아파트가 건설되었으나 1970년 4월 8일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일어나면서 건설사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970년대 서울, 가자! 강남으로
1970년대의 서울은 유신체제 아래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이 성장하면서 소득수준의 향상과 도시빈민의 증가가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불균등 발전', 속에서 서울은 새로운 청년문화와 노동운동이 탄생하는 '질풍노도의 시대' 를 경험했습니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의 인구는 550만 명에서 840만 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었으나 아직 한적한 시골로 남아 있던 한강 이남 영등포 동쪽의 영동 지역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강남' 이라는 지역명으로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광활한 강남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강북의 명문학교들을 강남으로 대거 이전시키는 등 강북 개발을 억제하고 강남에 특혜를 주는 다양한 유인책들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발 촉진책들과 부동산 투기 열풍이 맞물려 강남은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중산층의 '강북 탈출' 과 더불어 '강남 입성' 의 인구 이동이 줄을 이었습니다.
강남의 탄생
1960년대까지 영동 개발은 단지 인구 급장에 따른 택지 확보 차원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북 도심부에 집중된 국가와 도시의 핵심 기능을 한강 이남의 신시가지(영등포, 영동)로 분산시키는 '3핵 도시안' 이 제기되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 노선 변경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건설은 이러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강남 개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이주가 필수적이었습니다.
1970년대 서울시는 한강 이북 40%, 한강 이남 60% 의 인구 비율을 목표로 한 '서울시 인구분산정책' 에 따라 강남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 강제와 특혜 등 각종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결과, 강북의 청량리와 신촌 이외에 강남의 영드포, 사당역, 강남역, 양재역, 잠실 등지에 부도심이 형성되면서 서울은 1960년대까지의 '단핵도시' 에서 탈피하여 점차 '다핵도시' 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영동지구 개발
1968년 고속도로 부지확보와 시가지 개발을 위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약 27km2 의 면적을 개발하는 초대형 사업으로서 도로보다 두세배 넓은 격자형 간선도로망을 갖춘 신시가지로 계획되었으나, 여러가지 제약으로 내부도로는 불규칙해졌고 상업용지와 녹지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는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를 건설하고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1973)로 지정하여 건설주택에 대한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위 사진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개발 당시 사진입니다.
잠실 개발, 한강의 섬에서 육지로
영동지구의 동쪽에 위치한 잠실지구는 서울의 인구를 분산시키고 강북 도심과 광주대단지를 연결하기 위한 신시가지로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1971년 수해가 잦은 한강의 섬 잠실을 매립하여 생긴 1120만m2 를 개발하는 계획이 착수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주택공사가 집단 아파트로 개발하였고 나머지는 서울시가 시영아파트를 건설하여 불량주택지구 철거민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국립경기장 부지와 석촌호수 주변의 상업용지도 이때 마련되었습니다.
강북 억제, 강남 집중화
1970년대에는 강북 발전을 억제하고 강남 개발을 촉진하는 여러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시청으로부터 반경 5km 구역에는 백화점, 도매시장, 주유소 등의 설치를 금지하고, 도심학원과 학교, 터미널도 강남으로 이전하도록 했습니다.
도심 재개발지구에는 건물의 신.개축과 택지개발도 금지했습니다.
1975년에는 서울시청의 영동 이전 계획도 발표되었습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의 삼성동 이전을 시작으로 강북의 명문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한강다리 집중 건설
강남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북 도심부와 강남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교량 건설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69년 제3한강교를 개통하기 전까지 한강 다리는 단 4개밖에 없었으나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1970년대에 마포대교, 잠실대교, 영동교, 천호대교, 잠수교, 성수대교가 건설되었고,
1980년대에 성산대교, 원효대교, 반포대교, 동작대교, 동호대교, 올림픽대교가 건설되어 강남과 강북을 하나의 도시로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산업과 노동의 상징, 구로공단
구로공단은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1964)에 의해 1965년 구로동 일원의 약 462,000m2(14만 평)에 조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1년 한국의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할 당시 구로공단의 비중은 9% 에 달하였으며 1977년에는 10만여명의 노동자를 품은 거대한 공업단지로 성장하였습니다.
1970-80년대 섬유 봉제 산업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메카이자 여공과 벌집촌으로 대표되는 낙후한 지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혀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운상가
1968년에 완공된 세운상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3가와 퇴계로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국내 최초 주상복합견물 상가 단지인 세운상가의 자리는 원래 일제강점기에 건물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공터였다가 6.25 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유입으로 무허가 판자촌이 되었습니다.
1966년 4월 서울특별시장은 세운상가 건립을 위해 무허가 건물을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운을 담고 있다' 라는 의미로 그 이름은 '세운' 이라고 지어졌다고 합니다.
1966년 9월 세운상가 가동 기공식을 시작으로 현대, 세운상가 가동, 청계,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8개의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모형은 현대 상가에 해당됩니다.
최신식 건물이었던 세운상가는 서울의 중심 상권으로 떠올랐습니다.
1968년 당시 상가임대료는 3평짜리 점포 기준으로 70만원이었으며 상업시설, 국회의원 사무실, 실내골프장 등이 입점하였습니다.
상층부 아파트는 높은 가격에 거래되어 주로 고위공직자, 사업가 등이 입주하였습니다.
이렇게 최고급으로 평가받던 세운상가는 1970년대 강남개발 및 한강변의 고급아파트 건립으로 거주자들이 대거 이동하였고 1980년대에는 주업종이었던 전기, 전자 분야가 도심부적격 업종으로 지정됨에 따라 용산전자상가로 이전되어 상권이 급격히 몰락하였습니다.
2008년 녹지 공간 조성사업으로 상가 건물이 모두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2017년 도시재생사업으로 전환되어 세운상가를 리모델링하고 재개장하였습니다.
도시제조업의 메카, 세운상가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남북 방향으로 1.1km 에 걸친 세운상가 지역은 6.25 전쟁 이후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자리잡았던 무허가 불량주택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도심재개발이 시행되면서 빈민 주거지를 강제 철거한 자리에 주상복합단지 세운상가가 들어섰습니다.
1970년대의 세운상가는 각종 전자제품, 음향기기 등을 생산, 판매하는 제조업의 중심지였으며 청계고가도로, 삼일빌딩과 함께 도시현대화와 경제발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대별 주요 주거시설 평면도
1956년 재건주택 (9평)
1960년대 이전의 주택은 단독주택으로 9평형 가족 주거용 주택이 표준 규모로 계획되었으며, 이후 아파트 평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직사각형 형태에 현관을 가지는 집중식 평면으로 밭 전자로 공간을 구분하여 방 2개, 마루와 부엌이 각각 1개로 구성되었습니다.
1958년 종암아파트 (17평)
광복 후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로 공공 단독주택과 유사한 밭 전자형 평면에 온돌방 2개와 별도의 마루방(거실), 부엌 및 화장실을 두고 전면에 발코니를 설치하였습니다.
연탄을 통한 바닥 난방을 위해 부엌과 방 사이에 단차가 있었습니다.
1962년 마포아파트 (15평)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로, 판상형 주동 외에 Y자형 주동을 도입하였습니다.
바닥 난방이 아닌 라디에이터식 난방을 도입하여 입식 생활을 의도하였습니다.
샤워 시설이 마련된 욕실, 수세식 변소, 전화 시설, 엘리베이터 등 당시 주택에서는 상당히 고급 설비를 갖추었습니다.
1969년 청운시민아파트 (11평)
시민아파트는 도심부 산자락의 판자촌을 철거하고 건설된 아파트입니다.
벽과 바닥, 기둥 등 기분 틀만 공공이 부담하고, 세대 내부 벽체와 문은 입주자가 부담하는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방 2개와 마루, 부엌, 창고로 구성되었으며, 화장실은 층별로 공공화장실이 마련되었습니다.
1975년 잠실주공아파트 (36평)
잠실주공아파트 중 고급형 평면으로 계획된 평면입니다.
당시 서양의 영향을 받아 식침 분리를 실현하기 위한 침실집중형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주방 옆으로 가정부방이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서초삼호아파트 9동 000호
1978년 입주가 시작된 서초삼호아파트는 전형적인 1970년대 강남의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이 아파트 9동 000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딸, 아들로 구성된 4인 가족이 1981년부터 30여년 동안 거주했습니다.
당시 중산층의 주거 형태 및 생활상이 담겨 있는 서초삼호아파튼 재건축 추진으로 2014년 철거되었습니다.
평면도가 아닌 그 당시 집 모습이 모델하우스처럼 꾸며져 있어서 옛날 생각도 나고 그 시절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실
오래된 카페트와 탁자, 의자, 그리고 안테나가 달려있는 TV 까지 예전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거실의 맞은편으로는 베란다가 있고 맞은편 동이 보입니다.
아파트는 전체적으로 복도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선풍기, 바둑판과 바둑돌, 청소기, 옛날식 전화기 등 디테일한 옛날 물건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거실 한쪽에 걸려 있었던 뻐꾸기 시계입니다.
정시마다 뻐꾸기가 나와서 뻐꾹뻐꾹 울던 고상한 시계, 저희 집에도 있었는데 말이죠 :D
공부방
학생의 공부방입니다.
책장에 꽂혀 있었던 컬러학습대백과도 예전에는 학생들의 필수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보트태권브이, 옛날식 책가방과 연필깎기, 옛날식 책장과 라디오를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합니다.
부엌
단촐한 가스레인지가 놓여 있는 옛날식 일자형 주방입니다.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밥솥과 보온병, 수저통, 믹서기 등이 놓여 있었습니다.
안방
TV 와 장롱, 서랍장 등이 있었던 안방입니다.
벽에는 경비실로 연결되는 인터폰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림이 걸려 있는 벽 아래에는 라디에이터가 있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4존에서는 해방 후 급격하게 변모하는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개발 과정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앞으로 서울이 어떻게 변해갈까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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