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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1존 (조선시대의 서울)

by Cecilia_J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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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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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래된 수도 서울의 역사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1985년 서울특별시립박물관의 건립 추진 계획이 수립되었고,

1993년 박물관 건물을 착공하여 1997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2001년이고, 2002년에 개관하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기본 이용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관람시간 : 09:00~18:00 (입장마감 : 17:30)

관람요금 : 무료

관람방법 : 개인 자유관람

 

각 층에는 다음 시설이 있습니다.

 

1층 : 서울역사자료실, 기증유물전시실, 기획전시실

3층 : 상설전시실

(1존 - 조선시대의 서울 / 2존 -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 / 3존 - 일제 강점기의 서울 / 4존 - 대한민국 수도 서울)

 

1층에 있는 기증유물전시실의 관람 후기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 1층 기증유물전시실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 1층 기증유물전시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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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에서는 3층에 있는 상설전시실에 대한 관람 후기를 남겨볼까 합니다.

1존은 조선시대의 서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2존, 3존, 4존의 관람 후기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2존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2존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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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3존 (일제 강점기의 서울)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3존 (일제 강점기의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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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4존 (대한민국 수도 서울, 1945-1970년대)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4존 (대한민국 수도 서울, 1945-1970년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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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4존 (대한민국 수도 서울, 1980-2010년대)

 

[서울/종로] 서울역사박물관 - 상설전시실 4존 (대한민국 수도 서울, 1980-2010년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s://museum.seoul.go.kr/www/NR_index.do?sso=ok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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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정하다

1394년, 한양 땅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졌습니다.
새 수도는 우리의 옛 전통과 풍수지리,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건설되었습니다.
먼저 우리의 성곽 전통에 따라 산세에 의지하여 도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주례'의 '고공기'에 나오는 '좌조우사'의 이념에 맞추어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습니다.
수도의 성곽은 백악산을 비롯한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으면서 평지 부분을 연결하여 완성하였습니다.


궁궐은 백악산 기슭의 명당자리에 건설하고 좌측에 종묘를, 우측에 사직을 두었습니다.
종묘는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고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던 곳입니다.
또한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을 궁궐 앞에 배치하였으며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변에 건립하였습니다.
이로써 한양은 조선의 수도로서 500년 역사를 담을 도시의 기본 틀을 갖추어 갔습니다.

 

 

한양도성 안 마을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공간은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성저십리 지역을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성부의 행정편제로 도성 안팎 지역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오부'를 두었습니다.
한편 한성부의 공식 행정 구역인 오부와는 별개로 도성 안은 지세와 수계를 중심으로 북촌, 남촌, 중촌, 동촌, 서촌(웃대), 아랫대의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북촌은 백악산 아래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역,
남촌은 남산의 북쪽 기슭 아래 지역,
중촌은 광통교에서 종묘 앞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양안 지역,
동촌은 낙산 서쪽 기슭 지역,
서촌(웃대)은 경복궁 서쪽의 개천 상류 지역,
아랫대는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 지역이었습니다.
이들 지역은 자연 경관과 입지 조건, 거주자들의 신분적 특성에 따라 각각 다른 지역문화 양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넉넉한 마을, 북촌
북촌 땅에는 햇볕도, 재산도 넉넉하였습니다.
뒤로는 백악에서 응복으로 흘러가는 산자락을 기대고 앞으로는 개천(현재의 청계천)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는 창덕궁과 서쪽으로는 경복궁, 두 궁궐을 좌우에 두고 있었습니다.
고위 관직에 있으며 재산과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모여 산 북촌은 한양 양반들의 중심 터전이었습니다.

 


이들은 백악산과 인왕산 기슭에 정자를 짓고 문학과 예술을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도성 안의 다른 곳에 비해 넓은 집터 사이로 난 북촌의 골목은 양반의 심부름을 하는 겸인과 노복들이 함께 생활하는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북촌은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권세가들의 대립과 갈등이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긴장감이 감도는 지역이었습니다.

 

북촌사대부, 부귀와 권세의 상징
한양에서 대대로 부귀를 누리며 살던 이들을 '경화사족' 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특히 북촌에 많이 살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조선초기부터 권력을 가진 사대부들의 주거지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백악산 자락에 있었던 의령 남씨 남곤의 집인 대은암,안동 김씨 김번의 무속헌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김번의 증손자인 김상용, 김상헌 형제와 후손들은 장의동(현재 청운동)에 산다고 하여 장동 김씨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자하동에는 의령 남씨, 옥류동에는 기계 유씨등이 대대로 거주하였습니다.
또한 인근에는 청송 성수침, 송강 정철의 집들도 있었습니다.

 

도심 속 명승지, 서촌
서촌은 한양도성 안 서북쪽 지역, 즉 백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경복궁 서쪽 지역을 말합니다.
웃대 또는 상촌이라고도 하며 백악산과 인왕산이 이어지는 산자락과 백운동천, 옥류동천 두 물길을 따라 전개되는 산세는 도성 내 최고의 명승지로 손꼽혔습니다.
이 지역은 조선초기부터 왕족과 권력층의 세거지였으며 육조거리와 가까워 서리, 녹사 등 하급 관리인 아전들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창의문 부근의 청풍계와 백운동, 인왕산 기슭의 세심대와 필운대는 봄철 한양의 꽃구경 명소였습니다.
유란동에서 나고 자란 겸재 정선은 일대의 명승을 독창적인 화풍으로 그려내며 조선후기 진경문화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서촌은 진경문화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옥류동천 일대는 천수경의 송석원에서 송석원시사(옥계시사)가 결성되어 조선후기 중인들의 풍류와 문예를 꽃피우던 여항문학운동의 본거지였습니다.

 

 

조선 제일의 번화가, 운종가
운종가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거리' 라는 뜻입니다.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가로지르는 동서대로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운종가의 양쪽으로는 국가에서 지은 행랑이 이어져 시전으로 쓰였습니다.
본래 시전은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점차 민간 판매가 늘어나면서 한양의 대표적인 상점가가 되었습니다.

 

운종가의 중심에는 종루가 있었습니다.
종루는 큰 종을 달아 도성의 대문을 여닫는 때를 알리는 시설로 한양의 한가운데를 기리키는 표지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현재의 남대문로와 만나는 교차로가 있어 일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이야기거리도 많았습니다.


운종가에는 이야기꾼과 재주꾼들이 저마다 솜씨를 뽐냈고, 여리꾼들은 순박한 이들의 쌈짓돈을 노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종루는 지방에서 올라운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이자 필수 방문지였습니다.
한양에 다녀왔음을 확인하기 위해 종루의 창살 개수를 헤아려 보았는지 물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운종가의 모습을 묘사해놓은 모형입니다.

 

시전상인과 난전상인
시전상인은 특권상인으로서 국가와 왕실에 국역의 의무를 지는 대가로 독점적 영업권인 금난전권을 보장받았습니다.
금난전권은 시전상인이 아닌 자가 함부로 물건을 판매했을 경우 이들이 판매하는 물건을 압수하고 판매자를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시전상인들은 이 금난전권을 통해 영업권을 가지지 못한 난전상인들을 억압하고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시전의 규모 이상으로 상품의 종류와 유통량이 많아지자 난전상인들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난전상인들의 금난전권 폐지 요구와 금난전권으로 인한 폐단의 발생으로, 1791년(정조 15년)에 신해통공이 시행되어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습니다.

 

 

책사와 서화사
광통교를 중심으로 개천 주변에는 책사, 서화사 등 서적과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책사에서는 방각본의 유통이 활발하였는데 방각본은 민간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여 판매하는 책자를 말합니다.
한양의 무교동, 미동, 유동 등 광통방 일대에는 판매를 목적으로 책을 찍는 출판업자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서화사에서는 그림을 애호하던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였으니 산수도 같은 그림이나 입춘에 쓰이던 액막이용 세화가 주로 거래되었습니다.
한산거사의 '한양가' 에는 광통교 주변에 있는 서화사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성 밖 한양, 성저십리
도성 밖 성저십리의 범위는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 속합니다.


조선전기에는 도성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한양 인구의 약 50% 가 거주하게 됩니다.
성 밖에 살았던 이들 가운데에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피는 빈민들이 많았습니다.
마포, 용산,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과 상품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동대문 밖 왕십리나 살곶이벌 등지는 한양 사람들이 소비하는 채소 등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도성 밖 성저십리는 조선후기 한양이 왕도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매화,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랑한 꽃 - 첫번째 이야기

매화에 대한 특별 전시 구역도 있었습니다.

 

 

매화, 겨울을 깨우는 봄의 향기
매화는 예로부터 청객, 청우, 빙옥처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 명칭들에서 한결같이 알 수 있듯이 매화는 맑고 높은 품격을 지닌 꽃으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 홀로 향기로운 꽃을 피우며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매화.
매화의 생태적 특성은 조선시대 선비들로 하여금 큰 감흥을 느끼게 했습니다.

 

속세를 떠나 은거하며 인고와 수절의 상징이기도 한 매화와 함께 하는 청빈한 삶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이자 꿈이었습니다.
고산처사, 매처학자 등은 이러한 바람을 표현한 말들입니다.
조선시대 문학과 회화, 도자기, 공예품 등에는 당시 사람들의 매화에 대한 애정과 찬미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매화를 최근에 제대로 자세히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보통 봄하면 생각나는 꽃들은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등이었거든요.

이번 특별 전시를 통해서 매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반 관람객들이 남긴 후기도 스크린에 떠 있었습니다.

 

 

영조 시대 '남옥' 이라는 사람의 매화시입니다.

 

펄펄 눈발 흩날려 소복소복 쌓이는데
정원뜨락과 합실의 거처 구분되지가 않네.
가냘픈 흰빛 신명을 더해 옥창을 밝히고 
외로운 맑음 힘을 얻어 금서를 차갑게 비추네.

 

모든 길은 한양으로
조선시대의 서울 한양은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곳이었습니다.
한양과 지방을 잇는 간선도로망은 18세기 중엽 6대로에서 18세기 후반 9대로, 19세기 후반에는 10대로로 증가하였습니다.
10대로는 한양에서 의주, 경흥, 평해, 동래, 봉화, 강화, 수원, 해남, 보령, 통영으로 이어지는 도로입니다.
간선도로망의 확대는 지방과 한양이 그만큼 밀접해졌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 도로망에는 기존에 여행하는 관리에게 역마와 숙식을 제공했던 역과 원이 점차 쇠퇴하고 상인이나 일반 여행객들이 이용하는 점막들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의주-평양-개성-한양을 잇는 관서대로는 사행로이면서 중국의 물자가 반입되는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또한 남쪽의 물산들은 삼남의 길목인 광주 송파장에 모여 한양으로 올라왔습니다.

 

 

황포돛배
조선장 김귀성에 의해 전통 한선기법으로 제작된 황포돛배입니다.
황포돛배는 조선시대 한강을 왕래하면서 상류로는 단양, 제천에서부터 하류로는 마포에 이르기까지 식량, 땔감, 소금 등을 수송하던 조운선입니다.
수심이 깊지 않은 강을 다니기 위해 평저선으로 만들었으며 뱃머리가 위로 올라가 여울을 타기 좋은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황포돛배라는 명칭은 돛의 색깔이 황톳물로 물들여 누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선시대의 서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었던 유익한 전시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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