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다녀왔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 https://sphh.sscmc.or.kr/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근대식 감옥입니다.
1908년 10월부터 1987년까지 약 80년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곳이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곳입니다.
서대문형무소는 그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1908년 경성감옥
1920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
그러다가 서울구치소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되었고 그 후 기존 구치소의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몇몇 시설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철거되었습니다.
그 후 1998년 11월 이 곳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여 그 현장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전시관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시관(보안과청사) : 형무소역사실, 민족저항실 1,2,3, 지하조사실
옥사전시 : 중앙사, 9옥사, 11-12 옥사, 공작사
야외전시 : 한센병사,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창고, 여옥사, 취사장, 망루.담장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번 포스팅에서는 옥사전시의 전반적인 관람 후기를 남기고자 합니다.
전시관(보안과청사) 과 야외전시 관람 후기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전시관(보안과청사): 형무소역사실 지하조사실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전시관(보안과청사): 민족저항실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야외전시 관람 후기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여옥사입니다.
여옥사 지하공간
이 곳에는 여옥사의 지하로 출입하는 계단이 있습니다.
지하 공간은 1990년 발굴 당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원래의 계단은 여옥사 바깥쪽에서 지하로 들어오게끔 되어있었으나, 1992년에 지하공간을 복원할 때 안전 문제로 폐쇄하고 현재의 나무 계단을 임시로 만들었습니다.
지하로 출입하는 계단의 모습입니다.
일설에는 이 지하공간에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를 징벌하기 위해 감금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한편 교도관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이후에는 이불 등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8호 감방에 수감된 사람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은 3.1 독립만세운동 때에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수감되었던 감방이었습니다.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현, 병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던 유관순도 1919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어 이곳 8호 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때 유관순과 함께 8호 감방에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는 개성지역 3.1 운동을 지도한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수원지역 3.1 운동을 지도한 김향화, 파주지역 3.1 운동을 지도한 구세군 사령 부인 임명애 등의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관순과 함께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옥중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만세운동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19.3.5.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남
1919.3.13.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천안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
1919.3.14.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논의하고 계획
1919.4.1.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주도. 부친 유중권과 모친 이씨가 현장에서 순국
1920.3.1. 서대문형무소에서 3.1 운동 1주년 옥중 만세 투쟁 전개
1920.9.28. 고문 후유증으로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서 순국
201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당시 3.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1910년대의 활동
강제병합 후 일제의 무단통치에 맞서 1919년 전국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화, 동덕, 배화, 숙명, 정신, 경성여고, 근화여학교(덕성여학교), 경성여상, 경성여자미술학교 등의 서울시내 여학교 학생들은 물론 일반 여성들이 대거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상호연대와 비밀조직 결성을 통하여 3.1 독립만세운동을 확산시키고 군중을 이끌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이곳 여옥사에서도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맞아 감방 안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옥중투쟁을 벌이는 등 조국 독립의 염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감옥 - 식민지의 여성과 독립운동
한번도 전체가 감옥화 되었던 일제의 식민지하 여성들은 민족 성차별과 성차별로 이중의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받았습니다.
이에 독립운동을 통한 여성해방을 지향하였습니다.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학생, 간호사, 농민, 여공, 행상, 기자, 점원, 전도사, 겨원 등 각계각층의 평범한 어머니이자 누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와 여성차별에 맞서 3.1 독립만세운동, 3.1 운동 1주년 만세운동, 근우회 활동, 광주학생운동 지지 만세 시위운동, 의열단 활동, 무궁화 전파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사회운동,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국가총동원법 거부 투쟁 등을 전개하며 조국 독립의 희망을 염원하였습니다.
"당신의 희생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둘러본 곳은 취사장입니다.
취사장은 형무소 내 재소자들의 식사공급을 위해 1923년 지어진 건물입니다.
내부는 취사실, 기관실, 욕실 3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취사실은 대형 솥을 걸어놓아 밥을 지었던 공간이고, 기관실은 보일러를 설치하였던 공간입니다.
욕실은 취사장 노역자의 위생관리를 위해 샤워실과 욕탕이 설치되었던 공간입니다.
해방 이후 1987년까지 이용되었으며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해 간 후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2009년 발굴을 통해 그 원형을 확인하여 2010년 복원되었습니다.
현재 내부에 기관실 자리와 외부에 집수정 흔적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1987년 당시의 취사장 내외부, 2009년 취사장 발굴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취사실에서 사용했었던 대형 솥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둘러본 곳은 옥사입니다.
긴 복도를 따라 양쪽에 감방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패통
감방 문 옆에는 '패통' 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패통은 감방 안의 위급한 상황을 간수에게 알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수감자가 급한 용무가 있거나 담당 간수를 부를 때 사용한 일종의 신호기로 감방 문 옆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감방 안에서 조그만 구멍 안의 밀대를 손가락으로 밀면 복도 쪽으로 나무 막대기가 쓰러지면서 튀어나오게 됩니다.
12옥사 징벌방 (일명 먹방)
벌을 주기위해 사용했던 2.4m2 넓이의 감방으로, 12옥사 안에는 세개의 방이 있습니다.
빛이 차단되어 먹처럼 깜깜하다고 하여 일명 '먹방' 이라 불렸습니다.
마룻널 끝에 구멍을 내어 용변을 처리할 정도로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습니다.
먹방에 갇히면 밤낮을 구분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수감자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독방
이곳은 1평도 안되는 좁은 공간으로 일제가 애국지사들에게 육체적인 고문과 심리적, 정신적 고문을 주기 위해 설치한 곳입니다.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애국지사들을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하였습니다.
특히 애국지사들을 특수범죄자로 분류하여 전기와 변기도 없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러한 독방에 투옥시킨 후 고문과 폭행 등 갖은 악형을 일삼았습니다.
독방의 모습입니다.
이런 곳에 갇힌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기록으로 보는 옥중생활
옥중에서 남겼던 여러 글들을 통해 옥중생활이 어땠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광섭 '나의 옥창일기'
기상 나팔소리에 뛰어 일어나 단벌 이불을 개고 수건에 물을 짜서 몸을 훔친다.
...(중략)... 홀딱 벗고 문 앞에 선다.
무멍 수건 하나를 들고 문이 열리자 고개를 끄떡 하고는 복도를 달려 층계를 내려와 큰문에 나서면 겨울 물에 풍덩 뛰어드는 듯 찬바람을 혹 느끼며 창창한 대한천에 뛰어든다. (후략)
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중략)...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후략)
한용운 '눈오는 밤'
감옥 주위 사방 산에 눈이 잔뜩 쌓였는데
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꾸는 꿈은 싸늘하네
쇠창살도 꽉 닫히지 않은 틈이 있는 탓에
한 밤중에 어디선가 찬 소리가 들려오네
김구 '백범일지'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 라고 야단이다. (후략)
여운형 '옥중 회고록'
감옥소 덕에 얻은 병이 다섯 가지이다.
맨 처음 상해에서 잡힐 적에 운동장에서 경관과 격투하다가 귀를 몹시 얻어맞았는데 그때 고막이 상하여 한쪽 귀는 아주 병신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서 이 한 개가 그만 부스러지고 말았다.
왠일인지 잇몸 전체가 상하고 염증을 일으켜 퍽 괴로웠다. (후략)
지봉하 '옥중편지'
저는 얼마 전까지는 아주 건강한 몸으로 지냈으나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어찌된 일인지 몸이 점점 쇠약하기 시작하여 수개월 전부터는 책을 읽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괴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후략)
형무소 복장 : 수인복
형무소 내 수감자는 미결수와 기결수로 분류됩니다.
미결수는 형 확정 이전의 대기자로 청색의 수인복을 입었고, 형을 확정 받은 기결수는 적색의 수인복을 입었으며, 병자는 흰색의 수인복을 입었습니다.
수인복은 계절별로 별도의 구분은 없었으나, 겨울철에는 수감자 개인이 옷감 안쪽에 솜을 넣어 입었습니다.
이러한 수인복은 주로 직물 생산과 양재봉공 노역이 이루어졌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제작되어 전국의 형무소에 보급되었습니다.
한편, 수인복도 영치가 가능하여 일부 수감자는 외부에서 들여온 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형무소 주 생활공간 : 감방
수감자의 생활공간은 주로 감방과 공장이었습니다.
수감자의 하루는 대부분의 시간이 노역이었고, 하루 30분의 운동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서신은 한달에 한번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감방은 가장 넓은 것이 13m2 크기였습니다.
이같이 좁은 방에 일제는 40~50명을 수용하여 수감자들이 누워서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게 하였습니다.
또한 수감자들 사이에는 일체의 대화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감방 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이 없어 나무로 만든 통에 볼일을 해결하였습니다.
채광과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매우 비위생적이고 열악하였으며, 난방 또한 없었습니다.
이에 여름철에는 더위와 각종 질병, 겨울철에는 추위와 동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옥중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광복회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 중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의열투쟁을 전개한 단체로, 당시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단체는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계승한 단체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의병적 성격의 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민단조합과
계몽적 성격의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이 규합된 광복회는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을 선포했습니다.
광복회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선택했습니다.
총사령 박상진은 광복회 초기부터 조직을 군대식 편제로 구성했습니다.
무장투쟁에 대한 관심은 광복회의 7대 투쟁 강령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광복회는 국내.외 독립전쟁 기지를 구축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며 의열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의의
민청학련 사건은 국가의 이름으로 고문과 사법살인이 자행된 사건이었지만 민주화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건으로 민중운동의 시각이 민주화운동으로 향했고, 이후 항쟁의 외연이 학생, 지식인에서 민중으로까지 확대됐기 때문입니다.
민청학련은 이전의 정책 비판이나 반대를 넘어 직접적인 정권 타도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는 참여자의 적극성과 결연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투적 형태의 반정부 항쟁의 양상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습니다.
또한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뿐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 재야 반정부 인사와 정치인들이 결합하고 양심적인 종교인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종교인들의 참여로 신자들이 유입되면서 운동의 저변을 일반 국민으로 확대하는 성과를 가져왔고 국제적인 반 박정희 여론을 이끌어 정권에 타격을 줬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반유신 운동은 우리 사회 민주 발전의 중요한 인적자원을 일궈냈습니다.
거듭되는 반유신 항쟁으로 새로운 반정부 인사들이 늘어나면서 유신체제 말기에는 그 수가 수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동지로서 전국적 유대관계를 형성했으며 위협적인 반정부 세력으로 결집했고 민청학련은 그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신붕괴를 촉발했으며 부마민주항쟁, 나아가 1980년 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 민주항쟁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1945년부터 1987년까지, 이 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공간입니다.
벽의 세 면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경성감옥에서 서울구치소까지 바뀌어 가는 동안 대한민국 근대의 역사가 이 곳에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전시실입니다.
건국훈장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 입니다.
훈격에 따라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나누어지며 훈장 외에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이 있습니다.
1949년부터 2020년 3월까지 총 15931명의 독립유공자가 서훈되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와 6만개의 별
배드보스, 2023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약 6만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도산 안창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팝아트 작품입니다.
은가루와 스와로브스키 원석을 사용하여 6만 개의 별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안창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명품 원단을 콜라주하여 옷을 표현하였습니다.
'Don't ever forget' 은 안창호와 수많은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족의 역사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압구정로데오 거리에 있는 도산 안창호 기념관에 가면 안창호 선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서울/강남] 도산안창호기념관 - 압구정로데오 도산공원 도산안창호선생의 발자취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국사책에서 글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셨던 분을 다시한번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국내여행 > 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강남] 누데이크 하우스 도산 - 압구정로데오 예쁘고 개성있는 카페 (0) | 2023.07.17 |
---|---|
[서울/강남]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 1층 델리 둘러보기 (0) | 2023.07.14 |
[서울/강남]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 2층 라이브러리 스파이스 & 허브 팬트리 (0) | 2023.06.29 |
[서울/강남] 브라이언스커피 - 양재천카페거리 매봉역 분위기 좋은 카페 (0) | 2023.06.25 |
[서울/서대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야외전시 관람 후기 (0) | 2023.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