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안창호기념관♡
압구정로데오 도산공원 안에 있는 도산안창호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압구정로데오 거리 한가운데에는 푸르른 녹지 도산공원이 위치해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호 '도산' 을 따서 만든 도산공원 안에는 도산안창호기념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도산안창호기념관 홈페이지 : http://www.ahnchangho.or.kr/
매번 도산공원 앞을 지나다니기만 하고 공원을 제대로 산책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날은 공원과 함께 도산안창호기념관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도산공원의 방문 후기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국내여행/서울] - [서울/강남] 도산공원 - 압구정로데오 산책하기 좋은 공원
도산안창호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기념관 앞에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큰 사진과 동상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독립협회 평양지회 회원으로 활약할 당시부터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시절,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사실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때 국사책에서 배운 적이 있었고 위인전도 읽어본 적이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곳 도산안창호기념관에서의 전시가 도산 선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기념관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에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리다"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한 간략한 영상을 감상했습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대한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도산 선생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말입니다.
도산 안창호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우리나라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였으며, 민족주의 사상가로 큰 삶을 살았습니다.
안창호는 우리 겨레가 일제의 침략과 지배 속에 고통받고 있을 때 위기에 처한 민족과 나라를 지키고 독립을 되찾고자 구국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자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안창호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 1894년 구세학당에 입학하였고 1897년에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독립협회가 해산한 후 1899년에는 고향인 강서군에서 점진학교를 개설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2년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한 뒤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1905년에는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재미한인사회를 지도하였습니다.
1907년 귀국한 안창호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는 등 구국운동을 총지휘하였습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을 눈앞에 두고 망명한 안창호는 러시아령 연해주와 북만주 일대를 순회하면서 재외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1911년 미국으로 돌아간 안창호는 흥사단을 조직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동포의 단결과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1919년 3.1 운동 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비와 조직을 위하여 중국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또한 각지에 수립된 임시정부를 통합하고, 통합임시정부 노둥국총판에 임명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활성화를 위하여 독립운동 방략을 세우고, 연통제, 교통국을 조직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항공기 도입을 추진하고 흥사단원 및 청년들에게 비행사 양성훈련을 받게 하는 등 항공력을 이용한 독립운동을 역설하였습니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를 추진하고 주도하며 민족 투쟁 역량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이후 만주 등지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 기지로서의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미주동포의 단합과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상촌 건설과 민족유일당운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자 미국 전역을 순회하였습니다.
1926년 중국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1927년에는 대독립당 건설을 추진했으며, 대공주의를 제창하였습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1932년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습니다.
1935년 가출옥한 안창호는 전국을 순회하고 송태산장에 은거하였습니다.
그러나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피체되었으며, 1938년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서거하였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서, 상해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전세계를 누비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던 분이었습니다.
1878 : 출생과 성장
1902 : 1차 도미 활동
1907 : 신민회 활동
1912 : 2차 도미 활동
1919 : 임시정부 활동
1925 : 3차 도미 및 대독립당 활동
1932 : 옥고와 국내 활동
도산 선생은 아시아 쪽에서는 중국, 북만주, 시베리아 일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했습니다.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을 누비며 이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하여 임시정부 산하로 개편하였습니다.
신민회는 만주와 러시아 접경지대에 농장을 개척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에 미주방면 대표로 선정된 안창호는 1910년 중국 청도에서 신민회원들과 향후 독립운동 방략에 대하여 회합을 하였으며, 만주 지역에 농지를 매입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는 대한인국민회로 확대 개편되어, 북만주 봉밀산 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이곳을 돌아본 후, 1911년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독일, 영국을 거쳐 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1911년 미국에 도착한 안창호는 1912년 당시 하와이와 미주 등지에 있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총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해외 한인의 단결과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할 중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해외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총지휘할 중앙정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익을 증진하는 영사관의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안창호는 민족운동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에서 청년들과 동맹 수련운동을 하며, 신민회의 청년학우회 취지를 계승한 흥사단 창설을 준비하였습니다.
1913년 5월, 도산 선생은 국내 각도대표를 창립위원으로 선출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하였습니다.
흥사단은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 에 목적을 두고, 동맹수련을 통해 건전한 인격과 강한 단결력을 가진 인물을 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흥사단의 지도이념으로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 정신을 정하고, 지.덕.체 의 삼육을 기본 덕북으로 하는 인격, 단결, 공민의 3대 훈련을 실시하여 민족운동의 중견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흥사단기의 도안, 약법기초안, 입단증서, 창립위원 피선 통지서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시절의 도산 선생과 일원들의 모습입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대표 자격으로 4월 미국을 출발하여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북경로 예배당에서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주장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또한 미주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였습니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한 안창호는 먼저 국내와의 연락기구인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습니다.
7월에는 임시사료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였습니다.
또한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독립운동 방략을 구상하였습니다.
1919년 9월에는 각지에 수립된 임시정부를 통합하고 통합 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에 취임하였습니다.
1920년 상해 대한교민단에서 주최한 신년축하식에서는 임시정부의 활동 지침을 제시하는 등 임시정부를 전 민족의 최고 지도기관으로 만들어 장기적인 독립 운동에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체 독립운동가의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습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부의장에 피선되어 독립운동의 통일과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대표화가 이른바 새 정부 창조론과 임시정부 개조론으로 의견이 갈리게 되어 성과 없이 끝나자, 안창호는 독립운동의 계파와 노선을 초월한 민족유일당 결성에 착수하여 대동단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4년 말 안창호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등의 조직을 돌아보고, 새로이 구상하는 대독립당 결성과 이상촌 건설운동의 자금모금과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하여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안창호는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의 단결을 역설하였고, 서재필 박사와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으 조직 정비를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에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과 동지를 확보하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와 동명학원의 운영자금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는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미국, 중국, 멕시코, 하와이 등을 누비며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였습니다.
안창호가 만든 지승공예품
(1933-1935)
윤봉길의거의 배후혐의로 피체된 안창호는 대전형무소에서 한지를 꼬아 만드는 지승공예품을 만들었습니다.
안창호가 가출옥할 때, 복역기간동안 도움을 준 간수장 김현태에게 선물한 것으로 그 손자 김종철이 흥사단에 기증하였습니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시작하였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패망하오.
아무런 곤란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
도산안창호기념관을 둘러보며 그가 정말 대단한 리더쉽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조직을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2013년 11월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졸업증서를 수여받았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 학당에 1896년에 입학하여 수학하였기에 2013년 명예졸업장을 받은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 외에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도산안창호기념관은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후원을 원하는 사람은 카드단말기 또는 은행계좌로 후원이 가능합니다.
도산안창호기념관.
도산 선생의 발자취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 못하였는데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전시였습니다.
도산공원에 방문하시는 분들은 입구에 있는 기념관을 꼭 들러 보시는것을 추천합니다.
* 도산안창호기념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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